4.19 혁명의 종국인 1960년 4월 25일 교수단 데모에 대하여 by 영담

4.19 혁명의 종국인 1960년 4월 25일 교수단 데모에 대하여


1. 4.19 혁명 당시 서울사대 교수들 사이에서 자신의 제자들이 가르치는 중고등학교 학생들까지 죽거나 다치는 사태가 벌어지자 더 이상은 안 된다는 공감대가 형성됨.

2. 지식인들 사이에서도 시국이 잘못 되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행동에 나서는 사람이 없었음.

3. 4월 25일 서울사대 교수들이 모여서 시국을 걱정하다가 과학교육과 정연태 교수는 이제는 우리가(교수들) 나서야 할 때라고 주장(더 이상 학생들이 다치게 나둘 수는 없다는 취지)하였고, 이러한 주장이 받아들여져 서울대 교수들 차원에서 4.19 혁명에 동참하기로 하고 동숭동에 있는 문리대, 법대, 상대, 의대 교수들에게 교수회관(동숭동 소재)에서 교수회의를 하기로 연락.

4. 당시 법대, 상대, 의대 교수님들은 대부분 직접 행동에 나서는 데 대하여 소극적이었으나 사대, 문리대 교수님들이 주장이 받아들여져 교수단 데모를 하기로 결정. 당시 그런 움직임이 있다는 것을 안 일부 사립대 교수들이 개인적으로 교수회의에 참여하였음.

5. 교수단 데모를 하기로 결정한 교수님들은 플래카드를 만들고 동숭동에서부터 광화문까지 데모를 하였음.

6. 이때 정연태 교수는 데모진 제일 앞 열에서 선창을 하고 주먹을 흔들며 데모를 주동하였음.(이 장면을 목격하신 분의 증언이 있음)

7. 이 교수진 데모에 충격을 받은 이승만 대통령은 지식인들도 자기를 버리는 것으로 판단하고 다음날 하야하기로 결정.

8. 수유리에 있는 국립 4.19 기념관 안에서도 4.25 교수진 데모를 비중 있게 다루고 있고, 방문객들(특히 학생들)에게 안내할 때도 자세히 언급하는 것을 보았음.

결론 : 4.25 교수단 데모에서 서울사대 정연태 교수는 그저 참여자 중 한 분에 불과하신 것이 아니라 아주 주도적인 역할(핵심적인 역할)을 하셨다는 것이다. 당시 정연태 교수 입장으로 돌아가 생각해 보면 서울사대 교수들만의 데모가 아니라 서울대 교수 전체의 의견이라는 것을 내세우고 싶어서 서울대 교수 전체를 소집한 것이다. 또 일부 사립대 교수가 개인적으로 참여한 것에 대해서도 대외적으로 서울대 교수 데모라는 것보다는 전체 교수단 데모라고 알려지는 것이 더 명분이 있기 때문에 그렇게 이름붙인 것이라고 알고 있다.

나의 추측으로 당시 동료 교수 한 분은 그러한 움직임에 대하여 소극적으로 처신하셨기 때문에 두고두고 서울사대 과학교육과 학생들에게 따돌림을 당한 것이 아닌가 조심스럽게 생각해 본다.(정연태 교수 정년퇴임 기념 문집 발간식에 참석해서 '어째서 자기한테는 주례 부탁하러 오는 제자들이 한 명도 없고 모두 정연태 교수만 찾아가는지 모르겠다'는 푸념을 할 정도였으니까)

또 이 교수단 데모 때문에 충격을 받은 이승만 대통령이 바로 다음 날 하야 성명을 내었으므로 4.19 혁명의 종국은 4,25 교수단 데모인 것이고, 그 핵심적인 역할을 바로 정연태 교수가 하셨다는 것이다.

내가 알고 있는 이야기는 물론 100% 정확하지 않을 수가 있다. 다만 내가 여러 사람들에게 들은 이야기이기 때문에 어느 정도 신빙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다 지나간 역사이고 더 이상 논쟁을 하고 싶지도 않다. 다만 그분의 직계 자손들은 자기 선조가 당시 어떤 행동을 하셨고, 그것이 역사에 기록되어 있지 않을지언정 제대로 알고 있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생각해서 이 글을 쓴다. 또 그러한 조상을 둔 데 대하여 자부심을 가져도 좋다고 생각한다.

(2017. 7.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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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랑앵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