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님의 유해를 국립 4.19 묘지로 이장하면서 by 영담



부모님의 유해를 국립 4.19 묘지로 이장하면서
-4.19 혁명의 종국인 1960년 4월 25일 교수단 시위에 대하여-



엊그제 이미 돌아가신 부모님 유해를 국립 4.19 묘지로 이장하였다. 선친은 오래 전인 1992년 지병으로 돌아가셨고, 우리 5남매는 고향 땅 할머니 묘소 아랫단에 안장하였다. 어머니는 93세까지 건강하게 사시면서 자식들이 사회에 자리잡는 모습을 지켜 보셨다. 어머니는 2015년 봄 돌아가시기 2주일 전부터 갑자기 배가 아프다고 말씀하셨다. 이에 급히 병원에 모셔서 진단을 받게 해 드렸지만 담당 의사는 이미 암 세포가 온몸에 퍼져 손을 쓸 수 없는 지경이라고 했다. 어머니는 돌아가시기 1주일 전부터 생전에 알고 지내던 사람과 작별 인사를 나누었다. 대부분 어머니 소식을 듣고, 어머니가 누워 계시는 병원으로 오셔서 말씀을 나누셨다. 그들과 옛날 이야기를 나누는 어머니 모습은 행복해 보였다. 거동이 불편해 오지 못하는 사람들과는 전화를 통해서라도 인사를 나누셨다. 내가 들으며 눈물지었던 말씀 중 하나는 "나는 곧 떠나네. 자네는 행복하고, 건강하게 살다 오게." 우리 남매 누구도 어머니가 돌아가실 거라는 이야기를 하지는 않았지만 어머니는 이미 알고 계셨던 것 같다. 며칠 후 어머니는 행복하게 하느님 곁으로 떠나셨다. 어머니는 생전에 당신이 영면하면 묘지를 따로 만들지 말고, 화장을 해서 아버지의 묘소 옆에 묻어달라고 하셨다. 우리는 어머니의 유언대로 해 드렸다.

올해 초부터 우리 집안에서는 그동안 미루어 왔던 친족 납골당 문제를 해결하기로 결정했다. 즉 윤달이 끼어 있는 양력 7월에 선영 곳곳에 묻혀 있는 조상님들의 묘소를 파헤쳐 친족 납골당으로 이장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7월2일(윤5월9일) 친족 납골당과는 조금 떨어진 곳에 묻혀 있는 할아버지와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백부님, 백모님 묘소를 정리하게 되었다. 이때 우리 남매들은 아버지와 어머니 유해를 국립 4.19 묘지로 이장하기로 결정했다. 2010년 아버지께서 국가보훈처로부터 4.19 유공자로 판정이 되어 뒤늦게 국민포장을 받았고, 국립 4.19 묘지에 안치할 수 있는 자격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 자식들로서는 부모님 묘지가 멀리 떨어진 곳에 있는 친족 납골당보다는 수유리에 있는 국립 4.19 묘지에 계시는 것이 더 좋다고 생각했다. 국립 4.19 묘지에 계시면 그 자체가 후손들에게 영광일 뿐 아니라 자주 찾아뵈기도 좋기 때문이었다. 또 묘지 관리도 나라에서 해 준다고 했다. 묘비도 나라에서 만들어 준다고 했다.

국립 4.19 묘지를 관리하는 박물관 측에서는 자손들 이름 뿐만 아니라 묘비 뒷면에 새겨 넣을 문안을 만들어 오라고 했다. 여러 의견 끝에 만들어진 문안에 대해 나는 탐탁한 느낌이 들지 않았다. 이 세상에는 없는 공적도 부풀리는 사례가 많은데 아버지의 공적은 너무 폄하되어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내가 알고 있는 4.19 혁명에 관한 아버지의 공적은 다음과 같다.

1. 1960년 4.19 혁명 당시 서울사대 교수들 사이에서 자신의 제자들이 가르치는 중고등학교 학생들까지 죽거나 다치는 사태가 벌어지자 더 이상은 안 된다는 공감대가 형성되었음.

2. 지식인들 사이에서도 시국이 잘못 되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행동에 나서는 사람이 없었음.

3. 4월 25일 서울사대 교수들이 모여서 시국을 걱정하다가 아버지께서는 이제는 우리가(교수들이) 나서야 할 때라고 주장(더 이상 학생들이 다치게 나둘 수는 없다는 취지)하였고, 이러한 주장이 받아들여져 서울대 교수들 차원에서 4.19 혁명에 동참하기로 하고 동숭동에 있는 문리대, 법대, 상대, 의대 교수들에게 교수회관(동숭동 소재)에서 교수회의를 하기로 연락.

4. 당시 법대, 상대, 의대 교수님들은 대부분 직접 행동에 나서는 데 대하여 소극적이었으나 사대, 문리대 교수님들이 주장이 받아들여져 교수단 시위를 하기로 결정. 당시 그런 움직임이 있다는 것을 안 일부 사립대 교수들이 개인적으로 교수회의에 참여하였음.

5. 교수단 시위를 하기로 결정한 교수님들은 플래카드를 만들고 동숭동에서부터 광화문까지 시위를 하였음.

6. 이때 아버지는 데모진 제일 앞 열에서 선창을 하고 주먹을 흔들며 시위를 주도하였음.(당시 나의 4촌 누님이 학교가 끝나서 집에 오다가 이 장면을 목격하셨다고 함)

7. 이 교수진 시위에 충격을 받은 이승만 대통령은 지식인들도 자기를 버리는 것으로 판단하여 다음날 하야하였음.

8. 수유리에 있는 국립 4.19 기념관 안에서도 4.25 교수진 시위를 비중 있게 다루고 있고, 방문객들(특히 학생들)에게 안내할 때도 자세히 언급하고 있음.


4.25 교수단 시위에서 아버지는 그저 참여자 중 한 분에 불과하신 것이 아니라 아주 주도적인 역할(핵심적인 역할)을 하셨다고 나는 생각한다. 당시 아버지의 입장으로 돌아가 생각해 보면 서울사대 교수들만의 시위가 아니라 서울대 교수 전체의 의견이라는 것을 내세우고 싶어서 서울대 교수 전체를 소집한 것이다. 또 일부 사립대 교수가 개인적으로 참여한 것에 대해서도 대외적으로 서울대 교수 시위라는 것보다는 전체 교수단 시위라고 알려지는 것이 더 명분이 있기 때문에 그렇게 이름붙인 것이라고 알고 있다. 또 당시 아버지는 나이가 37세에 불과한 젊은 교수에 불과하였으므로 당신보다는 나이가 많고 대외적으로 유명한 사람을 회장단으로 앞장 세우는게 좋을 것이라는 판단을 하셨을 것이다. 아버지의 이러한 행적에 감명을 받은 제자들은 선친을 '행동하는 양심'으로 존경하였던 것이다. 참고로 선친의 회고록에는 박정희 유신체제 하에서도 별다른 이유없이 보안사에 끌려가 고초를 겪으신 일이 실려 있다.

나의 추측으로 당시 동료 교수 한 분은 그러한 움직임에 대하여 소극적으로 처신하셨기 때문에 두고두고 서울사대 과학교육과 제자들에게 따돌림을 당한 것이 아닌가 조심스럽게 생각해 본다.(아버지의 정년퇴임 기념 문집 발간식에 참석해서 '어째서 자기한테는 주례 부탁하러 오는 제자들이 한 명도 없고 모두 정연태 교수만 찾아가는지 모르겠다'는 푸념을 할 정도였으니까)

또 이 교수단 시위에 충격을 받은 이승만 대통령이 바로 다음 날 하야 성명을 내었으므로 4.19 혁명의 종국은 4.25 교수단 시위인 것이고, 그 핵심적인 역할을 바로 아버지가 하셨다는 것이다.

당시 아버지의 행동을 인상적으로 보고, 기억하던 사람이 한 장의 교수단 시위 사진에서 아버지의 모습을 발견하고는 자기의 일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의 행적을 추적하여 국가보훈처에 신청하였다. 그 결과 아버지는 뒤늦게나마 4.19 유공자로 지정되어 2010년 국민포장 수상과 함께 국립 4.19 묘지에 안장되는 영광을 누리게 되었다.(어머니와 함께)

내가 알고 있는 이야기는 물론 100% 정확하지 않을 수가 있다. 다만 내가 여러 사람들에게 들은 이야기이기 때문에 어느 정도 신빙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다 지나간 역사이고 더 이상 논쟁을 하고 싶지도 않다. 다만 그분의 직계 자손들은 자기 선조가 당시 어떤 행동을 하셨고, 그것이 역사에 기록되어 있지 않을지언정 제대로 알고 있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생각해서 이 글을 쓴다. 또 그러한 조상을 둔 데 대하여 자부심을 가져도 좋다고 생각한다.

(2017. 7.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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